눈먼 부엉이

 

 

최근 신간 코너에서 『눈먼 부엉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작고 그리 두껍지 않은 이 책에서 뭔가 알 수 없는 신비에 싸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낯선 미지의 책을 발견했을 때 나는 습관처럼 표지를 넘겨 작가에 대한 설명을 본다. 그 책이 번역서일 경우에는 옮긴이에 대한 정보도 함께. 그런데 이상하다. 『눈먼 부엉이』의 저자 사데크 헤다야트(1903~1951)가 생을 마감한지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2013년) 이 책이 번역되어 신간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다. 무슨 사연이 있는 책이길래 이제서야 재조명되어 빛을 발하게 되었는지 일단 읽어보기로 했다.

 

책 속에는 자신의 그림자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는 필통 화가가 등장한다. 정신 분열증 환자이다. 술과 아편에 중독되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그는 매번 필통에 어디선가 목격한 적이 있는 듯한 한 장면을 똑같이 그리고 있다.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 그것도 항상 같은 모양의 사이프러스 나무, 그 아래에는 인도의 요기를 연상시키는 곱사등이 노인이 커다란 외투를 몸에 두르고, 머리에는 터번을 쓴 채 앉아 있는 것이다. 땅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그는 무엇엔가 놀란 몸짓으로, 왼손의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있다. 노인의 맞은편에는 검고 긴 옷을 입은 소녀가 서 있다. 소녀는 허리를 구부리고 노인을 향해서 손에 든 메꽃 한 송이를 건네준다. 소녀와 노인 사이에는 좁다란 시내가 흐르고 있다."(눈먼 부엉이 p.13)

 

화자는 이 장면을 계속 목격한다. 비슷하지만 약간 변형된 형태로 이러한 장면을 곳곳에 묘사하고 있다.

 

"인도 요기를 연상시키는 곱사등이 노인이 머리에는 터번을 둘러쓰고 사이프러스 나무 아래에 구부정하게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노인이 손에 들고 있는 악기는 시타르와 비슷했다. 부감 다시처럼 인도의 사원 무희로 보이는 한 소녀가, 마치 노인에게 붙잡힌 양 두 손을 쇠사슬로 칭칭 묶인 채, 노인 앞에 서서 춤을 추고 있었다. 내 눈에는 노인 역시 코브라와 함께 지하 고문실에 갇혔던 사람으로 보였다."(눈먼 부엉이 p.110)

 

이뿐만이 아니다. '곱사등이', '노인',  '언청이', '신경을 건드리는 메마른 웃음소리'와 함께 '어께가 들썩인다', '왼손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있다'거나 '왼손 집게 손가락을 잘근잘근 씹는다' 등의 표현이 여러 등장 인물에 걸쳐 공동적으로 묘사된다. 인물의 공통점을 바탕으로 인물의 관계를 유추해 보려 해 보지만 이내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만다. 여러 가닥의 실이 얽히고 설켜 도저히 풀리지 않는 실뭉치를 풀어보려다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화자가 그렇게 목격했으니 그렇다고 볼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다.

 

화자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지만 간혹 진실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내 삶은 부자연스럽고 ,불가해하며, 비현실적이었다. 마치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필통에 그려진 그림처럼. 아마도 이 필통 그림은 광기를 앓고 있던 어떤 우울한 화가가 그린 것이 틀림 없으리라."(눈먼 부엉이 p.139) 같이.

 

하지만 화자가 전달하는 이야기 중 어떤 게 진짜 모습이고 어떤 게 환상 속에 서 본 거짓인지 알 수 없다. 화자는 자신의 아내가 정육업자, 상인, 경찰관, 이슬람교 사제 등 여러 명의 애인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여 아내를 창녀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진실인지 아니면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다고 여기는 화자의 착각인지 알 수 없다. 화자는 정육업자와 똑같은 뼈 손잡이 칼을 가지고 있고 곱사등이 고물상 노인과 똑같은 애나멜 꽃병을 가지고 있으며 경찰관이 부르는 노래와 똑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고 코란을 구절을 종종 읊조린다. 심지어 화자는 거울 속에서 늙어빠진 고물상의 얼굴, 정육업자의 얼굴, 그리고 아내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한다.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는 화자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현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책을 읽다보면 약간 변주되어 끊임없이 반복되는 짧은 동영상을 계속해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마지막 책장을 넘긴 후에 중간중간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있는 것같아 다시 책장을 앞으로 넘기고 또 넘기고.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책 중간의 아무 부분에서나 읽기 시작해도 엄청난 속도로 책에 매료되어 들어간다. 꼭 책에서 마법의 주문을 걸어 나를 자꾸 끌어 당기는 것같다. 이러다간 한도 끝도 없겠다. 이 무섭고 위험한 책을 덮어 버리고 도서관에 반납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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