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해도 알아야 할 채식주의의 두 얼굴

채식의 배신

 

 

두 번째로 접한 배신 시리즈. 『채식의 배신』. 예전에 읽었던 『긍정의 배신』처럼 이번에도 역시나 긍정적으로 인식되는 것이 비판의 대상이다. 『긍정의 배신』에서는 긍정의 신화를 지적하였다면『채식의 배신』은 채식의 신화를 문제로 삼는다. 채식은 건강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육식처럼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이상적인 식사 방법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신화일 뿐이라니.

 

지금껏 육식을 비판하는 글을 숱하게 접했지만 채식을 비판하는 글은 처음이다. 도대체 채식에 어떤 문제점이 있다는 것일까.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인지 글을 읽어 나갔다. 저자는 채식의 문제점을 도덕적, 정치적, 영양학적 측면에서 지적한다.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한 저자의 반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솔직히 채식주의자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더 쉽게 수긍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대안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나치게 주관적인데다가 극단적이다. 현실적으로 적용할 가능성도 없고 허구맹랑한 주장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채식의 배신』에서 기억할만한 점이 있다면 도덕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알려진 채식의 이면에도 폭력과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예로 작물을 수확하는 데 방해가 되는 달팽이나 애벌레, 메뚜기 같은 곤충을 죽이는 것을 외면하고 있지 않은가. 비건이었던 저자의 고뇌 속에서 채식과 육식에 대해 좀더 균형잡힌 시각을 형성할 수 있었다.

 

"채식주의의 윤리는 결국에는 기계적인 모델의 한 변형일 뿐이다. 그 윤리 체계는 우리 인간의 인본주의적 혹은 종교적 윤리 체계를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몇몇 동물에게만 확대·적용한 것일 뿐이다. ...(중략)...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할까?  그것이 문제였다. 바로 나의 개인적, 정치적 영적 고뇌. 포유류, 어류, 곤충, 식물, 플랑크톤, 박테리아? 이 세상에서 가장 미세한 생명도 '우리'에 포함시킬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누구'가 되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는가? 나는 마침내 답을 찾았다. 나는 선을 긋지 않을 것이다. 대신 원을 그릴 것이다."(채식의 배신 pp.162~163)

 

"먹이 사슬은 일직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원형이기 때문이다. 만일 끝이 있다면 동물의 시체를 분해해 식물에게 먹이는 곳일 것이다. 인간도 사실은 맛잇는 한입거리 간식에 불과하다. ...(중략)... 우리가 이 순환에서 우리의 위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우리도 여기 속할 수 있다. 우리는 먹기도 하지만 먹히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향연의 재료로 사용될 것이다."(채식의 배신 p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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