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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파는 가게

 

 

제목이 그닥 당기지는 않았다. 그런데 작가 이름이 이하. 지금껏 내가 접한 문학인 중에서 으뜸가는 천재로 손꼽히는 - 이상이 떠오르더니 본래의 한자 뜻과는 전혀 상관 없이 '이상과 이하'라는 상반된 이름에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이상의 글만 접해봤으니 이하라는 사람이 쓴 글을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같다. 그렇게 재미 반 호기심 반으로 이하의 글을 읽게 되었다.

 

내가 읽은 책은 『기억을 파는 가게다. 『기억을 파는 가게』는 판타지 성장소설으로 사춘기 여학생의 고민을 아주 독특한 방법을 통해 해결해 나간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떼내어 팔아버린다.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그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기도 한데 『기억을 파는 가게』에서는 정말로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버린다.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기억을 이식받기도 하고 성형하듯 가공도 한다. 정말 매력적이다.

 

주인공 채아리는 지금 자신을 힘들게 하는 정민이와 아빠에 대한 기억을 하나씩 지워 버린다. 홀가분하고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 기억을 지웠을 때 내 안에서만 다른 사람의 실체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도 내 모습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더니. 기억 제거의 부작용으로 아리는 점점 유령처럼 형체가 없는 그림자 인간이 되어간다.

 

결국엔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상하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주인공 아리도 예전에는 사람이었다는 메멘토이의 장난감처럼 하나의 장난감 인형이 되어 버렸다. 이야기의 초반부에 아리가 메멘토이의 초대장을 발견했을 때만 해도 메멘토이의 초대장을 발견한 것이 큰 행운인것 같았는데 메멘토이의 초대장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기억을 지우는 것에 중독되어 점차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보니 메멘토이의 초대장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다행히 고양이 재리를 시작으로 주인공 아리와 험프티 덤프티도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전체적으로 해피엔딩인 듯하지만 못난이 삼형제처럼 끝까지 완전히 잊혀진 사람들도 있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여러분들이 조금이나마 자신의 아픈 기억과 마주 앉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더는 등 돌리지 않고, 더는 괜찮은 척 웃지만 말고, 가만히 그 기억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기억을 파는 가게 p.224) 라고 말한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인한 시련으로 고양이 재리가 된 담임 선생님, 어린 시절의 불행한 기억을 없애고 행복한 추억으로 재구성하려다 기억 이식에 중독된 아주머니, 도박에 빠져 가족과 재산 다 날리고 험프티 덤프티가 된 상희 아빠의 사연을 보면 『기억을 파는 가게』는 비단 사춘기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힘들어 하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을 붙들고 나아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찾게 해 주는 책이지 않은가 싶다.

 

『기억을 파는 가게』를 읽으며 인상에 남은 구절을 옮겨 적는다. 대부분  대화 속에서 발췌한 것이라 나열해 놓기에는 어색하긴 하지만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 보라 고양이 재리(담임 선생님)의 말 중에서

"기억은 네 몸 일부나 마찬가지라는 걸명심해. 싫다고 마냥 떼어내는 게 좋은 일아 아니라는 얘기야." (기억을 파는 가게 p.80)

"기억은 항체이자, 신체라는 사실. ...(중략)... 네가 가진 기억들은 아무리 아픈 것들일지라도 비슷한 체험이 반복될 때 하나의 면역 기능을 한다는 사실이야."(기억을 파는 가게 p.131)

"한때는 모든 것을 잊은 채 투명 인간이 되고 싶을 때가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지금은 모든 것을 가슴 깊이 새긴 채 새로운 시작을 하고 싶을 뿐이야. ...(중략)... 너희는 먼 과거, 아니면 먼 미래서만 살고 있어. ...(중략)... 지금 삶을 저당 잡힌 채 나중 삶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지. 그렇게 나이가 들면 지난날을 후회하며 또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 대부분 인간은 단 한 번도 지금, 여기에 존재한 적이 없단다. 나 역시 그래서 한번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어.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과 현재를 가꾸면서 말이야. ...(중략)... 너희도 '지금'을 찾기 바란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금을 말이다."(기억을 파는 가게 pp.207~208)

 

- 달걀아저씨의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기 자신이야. 누구든 한 사람만 자신을 기억해줘도 인가으로 살아갈 수 있어. 그게 자기 자신이라고 해도 말이야."(기억을 파는 가게 p.185)

 

- 아리의 기억 속 아빠의 말

 "아빠는 말했다. 세상에서 최고로 비싼 금은 황금도, 소금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고."(기억을 파는 가게 p.183)

 

별 기대없이 『기억을 파는 가게』를 펼쳐보았지만 나름 흡족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저자가 맨 마지막으로 한 말 -  "여기, 메멘토이의 마지막 초대권을 당신에게 드립니다."(기억을 파는 가게 p.224) 는 왜 덧붙였는지 모르겠다. 설마하니 『기억을 파는 가게』를 다 읽고도 메멘토이에 가서 기억을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도 메멘토이의 초대장은 필요 없을 것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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