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원짜리 컵라면

 

 

나홀로 인터라켄 여행에 올랐을 때의 일이다. Balmer's에서 만난 한국계 미국인 남매가 같이 번지점프를 하러 가자고 제안했다. 안내 책자를 보이며 재미있을 것같다고 같이 가잔다. 번지점프는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이 아니면 알프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인 융프라우요흐에 갈 기회가 없을 것다. 그래서 융프라우행을 택했다. 마침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할인 티켓도 있고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을 주섬주섬 챙겨 먹고 ost역으로 갔다. 융프라우로 올라가는 티켓을 사고 신라면 교환권도 받았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등반열차에 올라 탔다. 처음에는 단체로 관광 온 서양 사람들 사이에서 나혼자 멀뚱멀뚱 거리고 앉아 있었는데 열차를 갈아 타다 보니 동양 사람들도 이내 많이 보인다. 같이 융프라우 길에 오른 한국인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저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하며 융프라우로 올랐갔다. 융프라우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서는 동영상을 보며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는 듯 가파르게 올라갔다. 그렇게 열차를 갈아탄지 몇 번만에 드디어 기대하던 융프라우에 다다랐다.

 

그런데 이런.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밖이 온통 새하얗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전망대에서 사람들은 너나할 것없이 기념 사진을 찍는다고 난리통이다. 내가 이 걸 보겠다고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어젯밤 숙소에서 번지점프 하러 가자고 할 때 같이 간다고 할 걸. 괜히 힘만 들여 여기까지 올라온 것같다. 유럽의 지붕 융프라우요흐에 올라왔다는 기념적인 사실에 만족해야했다.

 

많이 걷지는 않았지만 추운 날씨에 여기까지 온다고 힘만 뺀 것같다. 배가 고프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기 매점 앞 테이블에 사람들이 옹기종이 모여 앉아 컵라면을 먹고 있다. 모두 한국 사람들이다. 하나같이 신라면컵을 들고 있지. 나도 컵라면을 바꿔 먹었다. 문득 이 작은 용기에 든 컵라면을 먹기 위해 3,454km를 올라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역에서 10만원 돈에 산 것은 융프라우 등반 열차 티켓이 아니라 컵라면 교환권이었구나. 컵라면 교환권을 사면 덤으로 주는 융프라우행 열차 티켓.

 

융프라우에 다녀 온 후 알게된 사실이지만 보통 융프라우에는 기상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방금 융프라우에 올랐다 내려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전망이 좋다고 하면 올라가는 게 현명하다고. 아니면 ost역에 융프라우 정상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여 주는 모니터가 있는 데 그 화면을 보고 등반을 결정하는 것도 한 방법이란다. 나처럼 멋모르고 올라갔다간 10만원짜리 컵라면을 먹고 내려와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기도 하지. 내가 융프라우에 다녀온지 몇 년이 지났으니 이젠 더 값이 나가겠지만 말이다. TV를 보다 신라면 블랙 광고를 보니 융프라우에서 신라면을 바꿔 먹었던 기억이 난다. 아. 요즘엔 융프라우에서 신라면 블랙을 주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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