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작가 응원프로젝트를 통해 알게 된 책. 『검은 활』. 책을 받아보기 전에는 역사를 전공했던 어느 한 주부가 쓴 소설이라고 들어서 처음이니까 아마도 단편 소설이겠지 싶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받아보니 두께감이 묵직하다. 설마 처음부터 장편 소설을 쓴 것인가? 대게는 짧은 소설부터 시작해 장편으로 넘어가기 마련인데 예상치 못한 결과물에 깜짝 놀랐다. 처음부터 긴 줄거리를 알차게 엮어나가기는 힘들텐데... 하지만 이러한 나의 우려는 한낱 기우일 뿐이었다. 대강 책을 훝어보니 나의 염려가 무색할 정도로 구성이 탄탄하고 저자의 글솜씨가 매끄러웠다. 우와. 정녕 이것이 저자의 첫소설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한참을 감탄만 하다 겨우 검은 활의 전설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빨려드는 묘한 매력.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이 망한 후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여러 나라가 성장해가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저자가 나를 데려간 곳은 동쪽 대륙에 예족이 살고 있는 화려국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의 상황이 얼마나 생생하게 전해지는지 마치 내가 화려국의 사람이 되어 그곳에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메주를 만드는 아낙네와 그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꼬마들, 사냥을 나갔다 짐승을 메고 돌어오는 사내들을 반기는 동네 사람의 모습이 내 기억 속의 한 장면이 되어 각인되었다.
사실적으로 묘사되는 고대 사람들의 생활 풍습을 접하다보니 자연스레 역사적 지식도 쌓였다. 국사 시간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가까스로 명칭만 익히기에 급급했던 것들 - 예를 들어 '무천'이나 '책화' 같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때에 적용되는 것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또 그 당시 각 나라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크게 성장해 나간 고구려의 상황은 어떠했는지 - 왕과 귀족 간의 권력관계와 규범, 문화가 재미 있는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다. 괜히 역사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게 아니었다.
『검은 활』의 정확한 시대적 배경은 우태후와 교체가 등장하면서 드러났다. 서안평을 공격했다가 패하고 그 여파로 환도성까지 내주며 피난길에 오르는 동천왕 교체. (서기 244년의 일이다.) 고구려의 명장 밀우와 유유, 유옥구는 교체를 보필하며 옥저로 향하고, 검은 활의 제조술을 터득하려는 주달은 고구려 최고의 활장이 수리를 데리고 검은 숲으로 간다. 교체를 죽이려는 위나라 관구검은 계속해서 고구려군을 추격하고, 최고의 활기술을 차지하려는 낙랑군 유무는 끊임없이 수리를 뒤쫓으면서 박진감이 고조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이야기 속에 속속들이 녹아 든 남녀의 사랑 이야기와 그들의 선택이 어우러지면서 검은 활의 전설은 무게감이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처지거나 가라앉지 않고 흥미진진하게 전개되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고 나니 마치 한편의 잘 짜여진 영화나 대하드라마를 보고 난 듯한 느낌이 든다. 넌지시 『검은 활』 의 이야기가 진짜로 영화가 되거나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상상을 해 본다.
하지만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검은 활』의 감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정을 제대로 하지 않은 글을 출판사에 넘긴 저자의 잘못인지 아니면 꼼꼼하게 감수를 하지 않은 채 출판한 출판사의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검은 활』의 감수에 대한 부분은 완벽한 옥에 티를 남기고 말았다.
알고보면 하나같이 글의 흐름에 크게 지장을 주거나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작고 사소한 부분 때문에 책을 읽다가 이내 멈칫 거리곤 했다. 중간 중간 오타가 하나씩 발견되었고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도 었다. 그리고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홀려 자연스럽게 넘어갔지만 돌이켜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이상한 내용이 발견 되기도 했다. 아마도 저자가 소설 속에 작은 재미를 더하려다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실수를 저지른 듯하다.
예를 들어, "메주를 모두 만들고 나면 그 다음에는 술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차조술을 빚어야 했다. 그러면 또다시 험담이 오고가고 일이 끝이 없다고 신세한탄이 이어졌다. 가장 험담을 많이 한 아낙이 가장 맛있게 차조술을 담갔다. 며칠만 지나면 한 집 건널 때마다 술 익는 냄새가 코를 자극할 것이다. 아낙들이 하는 일의 중심에는 항상 은월이 있었다. 메주를 만들고, 술을 빚고, 장을 담그는 일까지 손길이 가지 않는 일이 없었다. 화려에서 가장 솜씨 좋은 아낙을 꼽으라면 단연 은월이었다."(검은 활 p. 27~28) 이 대목을 보면 은월이 가장 으뜸으로 술을 잘 담그니 은월이 가장 험담을 많이 한 아낙이라 파악된다. 그런데 그 바로 그 아래 부분에서 묘사하는 은월을 보면 전혀 험담을 하거나 그럴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은월은 "시아버지의 뒷배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우쭐하거나 자신을 내세우는 법이 없었다."(검은 활 p.28) 그리고 은월은 큰소리를 내거나 앞에 나서는 법이 없었으며, "혼인이나 장례 같은 큰일뿐 아니라 아낙들 간의 사소한 시비까지 중재하며 신망이 두터웠다."(검은 활 p.28) 아낙들이 고된 노통을 하면서 험담을 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을 걸죽하게 풀어낸 저자의 글솜씨는 좋았지만 그것이 차분하고 솜씨 좋은 은월과 만나면서 대치되고 말았다.
또, "우태후가 죽은 후에도 교체는 그 그늘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다. 연나부는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교체를 압박하려 들었다. 고구려 왕은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었다. 나부들의 왕이었다. 나부가 군사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치를 수도 없었다.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나부의 의견을 마음대로 무시하거나 짓누를 수 없었다."(검은 활 p. 98) 이 대목을 읽으면서도 뭔가 부자연스러움을 느꼈다. 내가 잘못 읽은 것은 아닌지 천천히 다시 읽었다. '고구려 왕은 절대적인 권력자가 아니다.' 맞는 말이다. '나부가 군사를 내어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치를 수도 없었다.'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 있는 '나부들의 왕이었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나부들이 군사권을 쥐고 있는데 나부들의 왕이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게 아닌가? 내가 해석을 잘못한 것인지. 이상하게 받아들인 것인지. 분명 앞 뒤 문맥상 힘없는 왕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무천제 날 당이의 심리가 아리쏭하다. 당이는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천지신께 제의를 드리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끼며 동해 옆에 서 있는 수리를 흘겨보았다."(검은 활 p.111) 그리고 동시에 "일 년에 한번 무천제가 치르지는 날이면 한껏 부풀어 오른 자부심이 땅으로 떨어졌다."(검은 활 p.112) 앞의 문장을 보면 당이는 평소보다 무천제날 기세 등등한 것 같은데 뒤의 문장을 보면 평소에는 기고만장하다 무천제만 되면 기운이 빠진 사람으로 묘사된다. 무천제 날 진짜 당이의 심리는 어땠을까? 동해의 정실부인인 수리가 자신이 낳은 아들을 양자로 삼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당이의 모습을 보면 아무 것도 안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듯한 수리에게 상당히 열등감을 느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무천제 준비는 자기가 다 했는데 정작 무천제 날 동해 옆에는 수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고 수리를 흘겨보았을까? 내 생각에는 자신이 만든 옷을 입고 제의를 드리는 동해의 모습을 보면 뿌듯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옆자리를 차지한 수리를 보면서 분통하고 갑갑한 마음이 들었을 것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밀우의 성격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소설의 중간부분부터 등장한 밀우는 의롭고 신망이 두터우며 정이 많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소설 속에서 밀우가 이수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을 때 저자가 묘사하는 밀우(이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이수는 "절대로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자신만의 원칙 속에서 살았다. ...(중략)... 어느 순간 마음은 굳어져 동정심 따위는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옥저로 맨발로 도망친 열 살짜리 계집아이의 요청도 거절했고 구야국에서 순장을 당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아무런 손을 쓰지 않았다. 그저 먹먹한 가슴을 안고 그 나라를 떠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감정은 점점 무감각해졌고 동정심 따위는 몰랐다. 스스로 철갑옷을 입고 세상에 점점 냉담해졌다. 어디에도 속하지도 안착하지 못하는 삶은 황폐해져갔다"(검은 활 P.21) 그런데 정작 이수는 화려국에 난입한 화적패를 무찌르고 염유장에게 쫓기고 있는 시화를 데리고 화려국을 떠났다. 악마같은 염유장이 시화를 잡기위해 혈안이 되었고 시화를 도와주다 걸리면 죽을 것을 알면서 말이다. 인간미라고는 찾아 볼 수 없을 것같은 냉정한 사람이라고 소개된 밀우는 왜 항상 무심한 듯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정의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거나 좋은 것에 있는 사소한 흠을 이르는 말. <네이버 국어사전>
아주 조금만 더 신경을 썼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인 것일 수 있지만 너무 재미 있어서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애착을 가지고 읽은 책인지라 사소한 오점에도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아마도 나중에 개정판이 나올 때에는 철저한 감수를 거쳐 오류를 교정하고 더욱 체계적이고 완벽하게 『검은 활』을 업그레이드 해서 내놓겠지! 첫작품으로 『검은 활』이라는 거대한 작품을 선보인 최윤정 작가라면 충분히 그렇게 하고도 남으리라 믿는다. 그래서인지 그가 새로이 집필하기 시작했다는 또다른 작품에 벌써부터 관심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