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가을 학기가 끝난 후의 성적 공고 기간. 저는 성적을 확인하기 위해 종합정보시스템에 접속했어요. 높은 점수를 기대했던 한 과목의 성적이 생각보다 낮았습니다. 게다가 아직 성적 이의 신청 기간인데 성적은 올라오자마자 "확정"으로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터무니 없이 낮은 점수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서운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같이 수강했던 과목 중에서 그래도 가장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고 레포트도 성실하게 작성해서 제출했던 과목이기에 점수를 확인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교수님이 이미 성적을 입력한 다음 오류가 없음을 확인하고 "확정"을 표기한 것은 아닌지 기대반 걱정반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제가 생각하는 성적과 그 성적을 받을만한 이유에 대해 피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답메일이 오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엄청 바쁘신가 봅니다. 이러다 성적 정정기간이 다 지나가겠습니다. 교수님과 같은 메일 서비스를 쓰면 수신확인이라도 정확하게 될텐데 수신확인도 안되고 답답할 지경입니다. 전화를 드려 메일을 발송하였으니 확인하라고 말씀드리기도 뭣하고 성적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말도 있고 해서 서서히 기대했던 마음을 접어 내렸습니다.

 

성적 정정기간이 끝나고 며칠 후 교수님에게서 [Re:]로 시작하는 제목으로 답문이 왔습니다. 짤막하게 그 점수가 제가 받아야 할 점수인 데다가 제 메일을 너무 늦게 확인한 탓에 이미 성적 정정기간이 지나가 성적을 바꿀 수 없다는 글이 적혀있는 게 보통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받은 메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메일 속에는 제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교수님의 답변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교수님은 학생의 인권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다시 제가 제출한 과제물과 성적을 살펴봤는데 그러던 중 과제물에 표시된 성적과 웹상에 등록한 성적이 다르게 입력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답니다. 그런데 때는 이미 성적 정정기간이 지난 뒤라 학교 행정실에 연락하여 제가 원래 받아야 했던 점수로 성적을 변경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수님의 실수로 인해 제가 받아야 할 점수가 아닌 다른 점수를 받을 뻔 했었다며 미안하다는 메시지도 함께 남겼습니다.

 

원래 성적 정정기간이 지난 다음에는 성적을 수정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교수님은 성적을 변경해야 하는 사유서와 증빙자료 갖춰 행정실에 제출해야 했을 것입니다. 학생이 성적 이의 신청을 하면 보지도 않고 묵살해 버리는 교수님도 많은데 제 메일을 받고 제가 제출한 과제물을 찾아 다시 성적을 확인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하물며 성적이 잘못 입력되었다 하여 성적 정정기간이 지난 다음의 행정적인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성적 이의 신청에 응해주신 교수님!

 

교수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런 교수님에게서 지도받고 수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덧1) 학생의 성적이의 신청에 성적이 어떻게 산출되었는지 수강생들의 성적을 익명으로 공개해버린 교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뜬금없이 날라온 성적 배점표에 의아했었는데 알고보니 학생들이 하나 둘 성적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응하던 교수가 아예 모든 학생들에게 성적 배점표를 첨부하여 메일로 보냈던 것입니다.

 

덧2) 몇몇 학생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좋은 성적을 준 교수가 있었습니다.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은 우연히도 성적 공고기간이 지나도록 성적이 올라오지 않아 교수에게 문의 전화를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 학생들의 증언에 따르면 메일로 발송한 과제물을 교수가 못 받은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 연락을 했더니 교수가 교수가 할일이 얼마나 많은데 학생들에게 일일이 그걸 다 확인해 줘야 하느냐며 소리치고 난리가 났었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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